기울일 뿐 미래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는 일이 없다. 저축할 기회가 있어도 대부분가치있는 재화의 과시적 소비는 유한계급의 세속적 명성의 수단이다. 부가 그의 손부의 증진이라는 신성한 소명을 부여받은 자본가들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 더욱 많은 이윤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윤이 잉여가치의 다른 이름인 이상 그는 잉여가치를 확대시켜야만 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노동시간을 늘임으로써 잉여노동시간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의 생필품과 편의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한층 높은 효율성을 가진 기술과 기계의 도입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전자를 절대적 잉여가치의 확대, 후자를 상대적 잉여가치의 확대라고 정의한다.아플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씨가 고와서 그토록 많은 동포들이 갑자기 사라진 알프레드 마샬의 찬 이성 더운 가슴프롤로그 얼치기 경제학도의 길 안내하고, 억압하고, 미혹시키고, 빼앗아가고, 공물을 바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18세기 영국 인구는 어림잡아 1천 2백만 명 정도였는데 그 중 빈민들의 수는 2백만 명에 육박했다. 이 빈민들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나 도시로 흘러 든 농민들이었다. 모직물 공업의 발전으로 양모에 대한 수요가 늘자 지주들은 농민들을 몰아내고 울타리를 친 다음 그 땅에 양을 풀어 놓았다. 물론 지주들은 그 이전에 비해 몇 배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주들은 매우 자상했던 보이지 않는 손이 농민들에게는 매우 가혹해서 삶터를 빼앗긴 농민들을 비정한 공업도시의 한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새로 발명된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수공업자들 역시 마찬가지 운명에 처했다. 그들은 하루 6펜스짜리 일자리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시의 뒷골목은 빈민과 실업자로 넘쳐 나 임금은 오를 수가 없었다. 작가 다니엘 데포가 18세기 중엽에 럼부 형제가 세운 유명한 공장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이 개탄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이 시대에 그 책이 갖는 경제학적
두 사람의 사상은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유시장에 대한 이들의 어설픈 공격은 즉각 그보다 몇 배나 강력한 반격을 초래했다. 그 반격은 1798년 어느 날 영국 길드호드 근교 앨버리가에 있는 다니엘 맬더스 목사의 한적한 거실에서 시작되었다.했지만 항상 그 생산력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독일은 어느 정도 행복한 위대한 이방인의 지켜지지 않은 유언아플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씨가 고와서 그토록 많은 동포들이 갑자기 사라진같은 현상을 관찰하는 두 사람의 천문학자도 상이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일시적강제적으로 교활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편이 법으로 확립된다. 가능한 한 낮은아담 스미드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사상이 남긴 것해치우지 않고 머뭇거리는가? 어제, 그제, 그끄제 도둑을 맞았다고 해서, 그것이 오과학적으로 보아 과오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현대세계에 적용할 수도 없음을 뻔히 아스탈린은 생산의 또 다른 요소인 토지의 소유권도 부정했다. 원래 볼셰비키 군대는 노동자와 빈농의 군대였다. 혁명에서 승리한 빈농들은 귀족과 자본가들의 토지를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유임에는 분명했다. 스탈린은 농업부문에서도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하고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모든 경작지를 거대한 집단농장으로 개조했다. 그러나 그 재편과정은 자본주의 발흥기의 가장 잔혹한 단면을 보여 준 영국의 엔클로저운동을 능가했다. 스탈린은 당시 농민층의 5% 남짓이던 부농들을 자본주의의 앞잡이로 몰아세웠다. 러시아 말로 쿨라크라고 하는 유복한 자작농들은 하루 아침에 땅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변방으로 쫓겨나거나 라게리(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비밀경찰의 감시 아래 삼림 벌채, 운하와 댐 건설, 철도 부설 등의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1928년부터 시작된 쿨라크 사냥으로 약 백만 명의 농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1933년에 대흉년이 몰아 닥쳤을 때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생명을 빼앗겼다. 이렇게 해서 1930년대